[연재기고] 이충걸 (전 GQ코리아 편집장)
"움직이는 상자, 그 신경증적 사랑의 기록"
2025.07.09
나의 첫 차는 3도어 프라이드 FS. 핏빛의 7년 된 중고차였다. 깨진 후미등 램프를 박스 테이프로 봉했고, 와이퍼 자국이 부채 형상을 그렸고, 차창 틈으로 남의 내장을 들락날락한 담배연기가 쳐들어왔고, 신촌 길에서 시동이 한 번 꺼지긴 했지만 나는 내 차를 사랑했다. 그때 자동차는 확신의 문제였다. 길이 있다고 믿는 마음, 그 길이 항상 이어져 있으리라는 환상, 결코 기름이 바닥나지 않을 거라는 자기기만. 예전에는 다들 속도를 사랑했다. 속도를 포기할 준비도 되지 않았다. 워낙 이동하는 종족으로 훈련받은 데다, 스피드는 존재의 증명이라는 거짓말을 오래 믿었기 때문에. 또 그만한 쾌락도 없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렇게 엔진을 만들고, 연료를 태우고, 도로를 삼켰다. 본질적으론 차를 세워도 지구는 돌고 우리도 가속 중이다. 정지의 감각은 너무 비실용적이라서 차라리 퇴보로 읽힌다. 제로백은 계급, 속도계는 좌표, 연료 게이지는 예금 잔고. 이때, 서울은 허구한 날 막히는 채로 속도의 최전선이 되었고, 도로는 기꺼이 빨리 감기 된 삶의 물리적 확장을 획책했다.아침 도로에서 엔진으로 으르렁대는 사람들은 GPS가 알려주는 목적지보다 그 뒤의 것들, 마모된 타이어의 껍질 안쪽, 라디에이터를 식히는 습기, 방음 처리된 문 사이로 차단된 외침을 되 비춘다. 세상은 두 번 회전한다. 한 번은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따라, 다른 한 번은 윤리라는 이름의 수증기 속에서. 전자의 리듬은 기계적이고, 후자의 회전은 도덕적으로 불규칙하다. 100년 전 디트로이트 공장 바닥에서 발흥한 자동차 문명이 1억 내연기관의 웅성거림으로 행성을 덮고, 백 만의 피드백 회로를 엮으며 자본주의의 심장으로 내달릴 때, 완성차 기업은 1차, 2차, 3차 협력업체로 뻗는 무지막지한 공급망으로 이들을 조립하고 조달한다. (친척이 느닷없이 철학적인 이야기를 꺼내듯 스스로 감정이 요동친다.) 이 구조는 분명 효율적일 텐데, 바퀴 밑이 잘 보이지 않는다. 꼬장꼬장한 시골 훈장처럼 트집 잡자면, 어떤 보고서는 자동차 한 대 만들 때 이산화탄소 6~17톤이 배출된다고 기술한다. 이산화탄소를 얼추 줄인다지만, 전기차 배터리는 리튬, 니켈, 코발트의 고밀도 채굴을 전제할 텐데, 어느 나라에서 무슨 방식으로 어떤 경로를 거쳐 공장에 왔는지는 불투명하다. 리튬은 칠레의 염호를 말리고, 코발트는 콩고 아동노동의 그늘 아래 채취되고, 니켈은 우즈베키스탄의 저지대를 파헤친다. 이때 질문 몇 개가 자동차 설계도 구석구석을 채운다. 그 충전소의 전기는 정말 재생 에너지일까? 공급로는 누구의 삶 위에 깔렸을까? 열다섯 살의 화학 시간, 지구본이 굴러다니던 교실에서 다들 선풍기 바람도 없이 시들어 가는데 선생님은 지구가 죽고 있다고 말했다. 지구는 그 때도 죽고 있었고, 지금도 나날이 죽고 있다. 다만 요즘은 죽는 방식이 좀 더 비싸졌다. 재활용, 순환, 탄소 중립, 전기차, 수소차. 이 모든 단어는 친환경이라는 이름의 사치스러운 종교 의식이 되었으니 바야흐로 버튼 하나로 구원받는 그 날이 왔다. 나에겐 얼핏 추상적이고 더러 성냥갑처럼 딱딱한 약어 ESG는 이상한 페로몬 냄새를 풍긴다. 꼭 셰익스피어의 세 마녀가 죄책감과 불균형과 어떤 악몽을 뒤섞어 만든 주문 같달까. 아무튼 ESG라는 신조어가 지금 자동차 산업에서 갖는 존재감은 기름 한 방울만큼 무겁고, 전기 1와트만큼 섬세하다. 그런데 매일 열 두 양동이씩 차가 쏟아지고 도로는 감당할 수도 없는 판국에 ESG는 더러 논쟁을 피하는 우회로로 비친다. 미래를 입에 담기엔 또 너무 기술적이고. 그래서 각주가 더 필요하다. 때맞춰 자동차 회사들이 움직였다. 어떤 회사는 다량으로 리사이클 원단을 쓰고, 다른 회사는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또 다른 회사는 내연 기관을 없애겠다고 발표한다. 지구를 위한다는 말만큼 상징인지 체계인지, 진작에 망가진 가치에 대한 사과문인지 잘 모르겠는 채 허기진 슬로건도 없을 것이다. 뭐야? 그러니까 공장에 빛을, 공급망에 눈을, 이사회에 질문을 하겠다는 그런 얘기야? ESG가 질문이 아니라 선언으로 작동하면 불안해진다. 뭔가 황급히 정색하는 것 같달까. 누가 “나는 이제 착하게 살기로 했어”라고 공표할 땐 이미 착한 게 아니라는 기분. 미안하다는 선언은 또 사죄가 아니라 명세서나 리포트, 브로셔로 보이기도 하니까. 아무튼 산업에는 가려진 사실, 감춰진 관계, 구조화된 침묵, 발음하지 않은 것들로 균형을 잡는 측면이 있는 듯싶다. 그것이 새로운 시장 전략이든 윤리의 소비자화든, 공공의 선이라는 강박적 체계화는 그들이 얼마나 불안한지, 동시에 얼마나 미안해 하는 지를 노출한다. 친환경 차라는 명칭도 살짝 의심을 부르지만 덮어놓고 비난하고 싶진 않다. 의심은 효율적인 정화 메커니즘이며, 우리는 비난으로 자기를 정당화하고, 더 나은 축이라고 스스로 설득하니까. 분명한 건, 하이브리드로 세상을 설득한 토요타나, 배터리로 욕망을 조형한 테슬라, 수소 연료전지 기술을 선점한 현대차가 지구를 구하는 독수리 오 형제는 아니겠으나 그들은 적어도 조금이라도 덜 망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엔진음의 쾌감으로 아롱지던 시대가 저물었다. 어떤 엔진이 가장 강한가를 따지는 사람도 안 보인다. 속도의 꿈이 속도의 죄를 묻는 나날이라니. 그러거나 말거나 속도 자체는 죄가 없다. 방향이 문제일 뿐. 내내 디젤 차만 타던 친구는 3년 사이에 전기 차를 두 번 바꾸었다. 처음에는 정부 보조금도 있고, 충전소가 집 가까이 있는 데다, 회사 앞 공영주차장 요금이 절반 할인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두 번째 바꿀 때는 못생긴 후배가 테슬라를 샀다는 시기심이 제일 컸지만, 여하튼 배터리 원산지도 검색했고, 시트도 가죽 말고 섬유를 골랐다. (그러나 충전 행렬이 국회 청문회만큼 늘어날 때, 지구는 살렸으나 시민의 인내심은 죽어났다.)올 여름, 그 친구 차 조수석에 앉았는데 차가 너무 정숙해서 살짝 불안하기도 했다. 차가 조용해질수록, 우리는 덜 존재하니까. 차가 더 많이 생각할수록, 우리는 덜 생각하니까. 어떤 기술은 인간을 손쉽게 배제하고, 편리를 핑계로 인간의 자리를 축소시킬 것이다. 그래도 싫은 건 아니었다. 평화롭다는 것은 어쨌든 중독적인 거라서.오히려 위안이 있었다. 차 안에선 도시의 미세한 숨소리가 들렸다.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수증기, 자전거 체인 소리, 아이가 우유병을 떨어뜨리는 소리. 문득 졸릴 땐 차가 달리는 건지, 옆길로 새는 건지, 아지랑이 속을 지나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차가 너무 고요해서 내가 사라진 느낌이 들어.”한 마디 하고 나니 내 귀에도 자동차 산업의 딜레마를 설명하는 진짜 괜찮은 은유로 들렸다. 모든 것이 이율배반으로 들끓었다. 엔진은 조용해졌으나 도시는 더 시끄러워졌다. 배기가스를 줄였지만 우리 안의 분노를 끄진 못 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목적지는 멀었다. 이때는 멈춘다는 말조차 속도의 일부가 되어 가속의 이름으로 둔갑한다. 바로 그 순간,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약간의 도덕적 만족까지 얻을 것이다. 나의 프라이드 사랑은 때로 무책임했고, 향수는 종종 무지했다. 그러나 자동차는 처음부터 나에게 기계가 아니라 서사였다. 밤의 항구, 아침의 논밭, 국도변의 전신주. 청춘에 나는 움직이는 상자를 타고 도시 경계 너머를 맛보았다. 이젠 아버지 세대보다 윤리적인 자동차를 타지만, 아버지 세대는 더 윤리적인 태도로 자동차를 대했다. 아버지의 차는 기억이고, 내 차는 사회적 풍향계이며, 아들의 차는, 글쎄,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조언의 기회 같다. 우리는 아이에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같은 시간에 출근한다. 수소 차에 앉아 환경을 위한다느니 어쩌느니 읊어대는 와중에도 손은 냉방을 최대치로 올린다. 그래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방식으로 도시 한복판을 지날 때 어떤 이성과 기계적 본능 사이에서 문득 질문한다. 움직이면서 동시에 고요할 수 있을까? 탄소를 줄이면서 욕망은 참을 수 있을까? 문제도 다 못 풀었는데 어느 길로 빠져나가야 할까? 나의 약화되고 악화된 시력으로는 운전을 할 수 없지만, 차는 매일 탄다. 금요일 밤 늦게, 고속도로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헤드라이트 행렬을 보면 마음이 춥고도 따뜻해진다. 그것이 기술의 열매인지, 올해의 고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동차는 밀리든 잘 빠지든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 주고 있었다.빗방울이 제네시스 GV60의 전면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7월엔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속도를 줄이고 창문을 내리면 보행자일 때는 몰랐던 도시의 다른 얼굴이 보인다. 신호등에 기대선 사람, 굽은 골목으로 사라지는 손수레, 쓰레기 봉투를 고르는 그녀의 손끝, 전기차 충전 케이블 한 줄이 늘어뜨리는 어떤 기다림. 간과된 침묵의 얼굴 위에 너무나 오묘한 비가시적 관계들이 엉켜 있는 것이다.에너지원이 바뀐다고 이동 방식이 바뀔 리 없다. 도로는 아스팔트 경로가 아니라, 세계의 작동 방식에 관한 집합적 환상. 우리는 여전히 어디로 간다. 여전히 고속도로를 달리고, 여전히 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고, 여전히 블루투스로 음악을 듣는다. 그리하여 언젠가 까만 잉크로 경구 한 줄 쓰고 싶다. 모든 달리는 것을 허하라.by 이충걸(에세이스트, 전 GQ코리아 편집장, 장편소설 ‘너의 얼굴’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