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사회에서 집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증빙 자료이자 공간 저 너머의 갈망이 되었다. 같은 동네에서 자라 내내 같은 버스를 탔고, 같은 음악을 들었던 친구가 부모 도움으로 집을 사서 동네를 떠났을 때, 청년은 버스가 반지하 자기 집 앞에 서지 않는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챈다. 그때 집이란, 얼마나 사랑하고 어떻게 공감했는지를 기억하는 장소라는 말은 청년에게 얼마나 한가롭게 들릴까?
남겨진 이들의 탄식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 부모는 보증을 잘 못 서서 나까지 여태 알거지로 살았어. 내 부모는 빛 대신 빚을 물려 줬어. 나 대학교 때까지 11평 집에 네 식구가 살았어. 나는 전세 대란에 떠밀려 고시원까지 왔어. 어느 순간 "나는 왜 아직도 월세에 살고 있지?"라는 질문은 덮어쓰기하듯 "왜 나는 실패한 것 같지?"로 둔갑한다. 지금은 싫든 좋든 주거 안정성, 미래 자산, 부모 도움 없이 이룬 유일한 업적이 되는 '자가(自家) 권위주의'의 시대이기 때문에.
욕망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우아하고 관능적이지만, 집에 관한 욕망은 그보다 훨씬 촘촘하고, 식욕과 더 가깝다. 다소간의 좌절과 쪽팔림으로 엮였달까. 어떤 관점으로는 조금 우습고 살짝 서늘하다. 왜냐하면 집은, 놀랍게도 개인 사례와 통계, 균열된 감정을 결합해 가족 내부 질서를 파괴하는 새 방식이기 때문에. 이젠 가족 안에서 조차 계급이 나뉘었다. 서로 다른 경제적 지층에 머무르는 한 형제라고 같은 세상에 산다고 말할 수 없지.
침묵의 이유이자 질투의 근거이며 저지된 분노. 집은 동서남북, 쉬지 않고 불타오른다. 오늘도 서울 모처에서는 있는 집 부모가 자녀에게 아파트 청약을 선물하는 중이다. 집은 또 하나의 명세서라서 부모는 계약서를 써주고, 자식은 거기에 사인한다. 그렇지만 등기 이전이란 단어가 횡재처럼 횡횡하는 광경을 누가 선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떤 땐 너무 화가 난다. 도대체 왜 뉴스는 허구한 날 아파트 값이 올랐다고 호들갑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연예인 집 좀 그만 내보내라. 카메라가 대리석 바닥, 천장까지 닿는 창, 전자 벽난로와 반려견이 뛰노는 테라스까지 핥고, 주방 수납장에 드레스 룸의 행거를 훑으면 "그래서 어쩌라고?"하는 소리가 예의 바른 내 구강을 비집고 나온다. 때 맞춰 자막이 "이 집, 실화입니까?" 요 지랄 하면 "와씨,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댓글이 창궐한다. 아, 이건 진짜 하우징 판타지의 재생산 아닌가. 뭔가 반복해서 본다는 건 결국 믿게 된다는 방증 아닌가.
매초마다 광고, 예능, 콘텐츠, 드라마가 합세해서 소유의 절대 가치를 떠벌린다. "너는 좋은 집에 살아야 돼. 넓고, 깨끗하고, 볕도 잘 들고, 무엇보다 자기 명의라야 돼." 게다가 드라마 캐릭터는 허구한 날 강남 아파트에 산다(그 놈의 강남. 오뎅 하나도 더 비싸고, 압구정 그 비싼 땅에 전신주 전선은 비에 젖은 인디언 물귀신처럼 얽혀 있고, 매장 사원들이 사장인 척 나대는 그 강남.) 유튜브의 부동산 채널은 사이렌 저리 가라로 속삭인다. "지금 사야 돼." "여기 폭등한다니까?" "영끌은 미친 게 아니야. 전략이고 투자고 계산이야." 전세 없는 사회를 예언하며 지 말 안 들으면 벼락 거지 된다고 공갈치면, 카메라는 좋다고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스캔한다. 아이를 안고 들어가는 엄마와, 응접실에서 책을 읽는 아빠와, 모든 장면을 품은 주방의 수전과, 대리석을 펴 바른 화장실과, 성모 마리아처럼 포근한 조명. 그것이 당신의 미래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이 시절의 한국에서는 "자가냐, 전세냐"라는 말이 관계의 국면을 결정한다. 소개팅 자리에서, 대출 창구에서, 가족 모임에서도 질문은 성가시게 따라붙는다. 여기엔 묵직한 전제가 있다. 내 명의의 집은 정착이지만, 임대는 임시 혹은 불안한 거주. 고관대작들은 포용하는 사회를 외치지만, 그런 구호 같은 건 우리 동네까지 닿지도 않고, 대출 심사 기준에서 탈락한 사람을 품지도 않는다. 내 집이라는 절대적 권능이 불타오르는 현실 속에서 사회는 더러운 컨버스, 라면이 식은 양은 냄비, 보증금 3천 만 원으로 몸부림치는 청년에게까지 속삭인다. 집이 없는 사람은 불완전해. 집은 게임이야. 누가 먼저 들어가느냐, 누가 젊음을 덜 낭비하느냐. 그리고 청년은 그것을 믿었다. 아주 깊이, 뼈처럼.
하지만, 아시다시피 유럽은 거개가 임대주택에서 산다. 베를린 시민의 80퍼센트는 세입자고, 파리는 60퍼센트, 코펜하겐의 절반 이상. 그들은 정부와 시가 제공하는 장기 공공임대 시스템 아래서 갈등 없이 산다. 대출은 무, 이자에 쫓기지도 않고, 거주 형태의 초조 없이 인생에 몰두한다. 그렇게 보면 임대의 존엄은 소유의 반대말 같기도 하다. 계약 너머 인간적인 거주랄까. 그렇지만 여기선 다들 알아서 제 영역을 축소한다. "어차피 내 집도 아닌데."
어차피 남의 집에서 세입자는 이사 계획이라는 샴 쌍둥이하고 산다. 2년 혹은 4년, 만기 시점이 육박해오면 검색에 불이 붙는다. 계약 연장은 곧 인상이며, 고정된 삶이란 없다. 전세는 영끌의 통로, 월세는 일종의 실패. 9월에 새 거처를 찾아야 하는 청년은 삼겹살을 구울 옥상이나 베란다를 희망 목록에 넣는다. 세입자의 순진한 공상이 아이러니하도록 슬픈 것이, 모니터의 부동산 페이지를 마구 스크롤하는 밤, 그는 화면에서 매물 대신 시든 얼굴을 보고야 말 것이다. 집은 '사는 곳'이지 '사는 것'이 아닌데, 이 세대의 집은 집보다 크고, 인간보다 중요하구나. 이러니까 "거기서 살고 싶다"는 말이 "빚져서라도 사고 싶다"는 뜻으로 바뀌는 거지.
그리하여 그는 서울의 집 한 채를 위해 다섯 계절을 보냈다. 버티는 계절, 준비하는 계절, 초조한 계절, 체념하는 계절, 계산하는 계절. 미래는 대출이 다 쓴 신용처럼 말랐다. 지옥이란, 미래를 저당 잡힌 현재의 또 다른 이름. 야근은 당연했고, 급여의 60퍼센트를 저축했으며, 커피도 치킨도 마다했다. 연애는 하지만 결혼은 삭제했다. 같이 살 집이 없어서. 실현되지 못 할 생각은 더 끈질겼다. 그는 개인의 생을 시장의 오차범위 안에 매몰시켰다. 지금이 마지막. 놓치면 다시는 서울에 발 붙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여섯 계절이 바뀌어도 집은 오지 않았다. 불가능한 꿈, 잡히지 않는 희망, 흘러가는 환영(幻影). 집은 무거웠다. 콘크리트와 욕망의 비율은 같았다. 지금을 불살라 나중의 벽을 지으려 했으나, 벽은 그를 지켜주지 않았다. 요람에서 벗어나자마자 내 집을 꿈꾸다 좌초한 청년에게 어머니 지구는 묻는다. "넌 왜 그렇게 나를 벽으로 감싸려고 하니?"
10년 전, 남산 자락에 집을 짓기 전에는 성수동의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내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예전 집이 좋았다. 나는 살짝 산중턱에 걸쳐 있어서 사철 높은 바람이 부는 그 아파트에서 평생 살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 엄마가 저 아래 재래시장에서 무 두 개를 사서는 그걸 들고 집까지 올라오는 걸 보고 평지에서 발을 디딜 수 있는 데로 옮겼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흔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그 또한 내 책임이었다. 이사하고 보니 거기가 '사는 곳'인지 '사 놓은 공간'인지 헷갈렸다. 외벽은 아름다운 포스트모던 시대의 유리였고, 안전한 동시에 깨끗했다. 그런데 어쩐지 새 집의 사회성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파트 정문 앞에 엄청 큰 마트가 없었다면 어쩌면 무척 쓸쓸했을 것이다. 이윽고 몇 년이 지나 남산 모처에 집을 지었다. 내 전공은 건축공학과지만 이 집을 지은 것으로 효용성이 다한 기분도 들었다. .
요즘 짓는 아파트엔 프리미엄, 와이드형, 마스터 존 같은 단어가 따라붙는다. 건설사의 언어는 건축이 아니라 마케팅이니까. 이때 ESG가 적절히 끼어든다. 고효율 자재, 태양광 패널, LED 조명, 친환경 벽지, 스마트 계량기...그러나 공간의 진짜 구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벽이 얼마나 호화스러운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벽이 누구를 밀어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라서.
도시는 집을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그 안의 사람은 점점 바깥으로 멀어진다. 모든 설계도에 개인의 특성은 제외되어 있으며, 사회적 형평성은 평면도에 등장하지 않는다. 아파트 분양 영상은 친환경 마감재를 강조하되, 인근 생태계 훼손은 말하지 않는다. 시침 뚝 떼고 친환경인 척 소비자를 속이는 그린워싱은 참 부드럽고 설득력도 있다. 겉으론 푸르러도 속은 곯은 나무처럼.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집은 누구를 위해 지은 건지, 화면 바깥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자주 궁금하다. 지구가 집을 짓는 걸까, 집이 지구를 허무는 걸까. 대단지 아파트를 지을 때 환경 항목이 얼마나 고려되는지는 의문이다. 건설 도중의 에너지 낭비, 절토와 메우기의 구조적 압력, 사라지는 녹지와 동물 서식지, 모든 것이 조감도 한 장의 이미지, 공원 조성 예정이라는 말 한 줄로 상쇄된다. 그 자리에 있던 마을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 에너지는 누구에게 쓰일까? 혹시 3대가 사는 집이 아니라, 임대수익을 기대하는 부자의 통장을 불릴까? 에너지 효율과 구조적 비효율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이때 보다 미묘한 항목이 뒤따른다. 건설사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증빙자료로 내세우는 것은 종종 커뮤니티 공간, 어린이 놀이터, 노약자 편의 설비 같은 것들인데 놀이터에는 아이가 아주 적고, 커뮤니티 센터는 예약제로 운영되며, 벤치엔 아무도 앉지 않는다면?
집을 짓는다는 건 단지 구조물을 세우는 기술적 해답뿐만 아니라 거주의 윤리에도 답해야 한다. 도면을 그리기 전에 그 집에서 펼쳐질 하루하루를 감각해야 하고, 자재를 고르기 전에 땅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며, 타인의 삶에 무엇을 예상하고 허락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누가 살 수 있고, 누가 밀려나며, 누구를 위해 준비했는지를.
솔직히 너무 많이 기대하진 않는다. 정서적으로 깊지만 논리적이며, 비관 속에서도 윤리를 요청하는 이야기 같은 건 기업의 우선순위와 좀 먼 듯 보여서. 그냥, 다음 번에 지을 땐 작은 평수의 조망도 신경 좀 써달라고, 낮은 층에도 햇빛이 잘 들게 해달라고, 해괴한 정원석에 돈 들이지 말고 그림자가 머무르는 나무 한 그루 더 심어 달라고만 하고 싶다. 그나저나 아파트가 도시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땐 무엇을 지켜야 하나?
가끔 건설사의 아파트 도면을 본다. 어떤 미련 때문에. 사방으로 터진 창, 확장형 거실, 드레스 룸, 파우더 룸, 다용도실이 따로따로, 킹 사이즈 침대, 벽에서 벽까지 이어지는 책장을 상상하다 말고 왜들 그렇게 넓은 집을 원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면적은 곧 존재감인 걸까? 타인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자기 확인의 구조물? 아, 맞다. 세상에는 평수라는 단위가 있었지. 대한민국에서 숨 쉴 권리는 평형 수로 보증되지, 참.
숫자는 늘 현실보다 넓은 데를 가리킨다. 인간 종의 위계가 면적으로 결정된다는 발상은 원시적이되, 더 정교한 형태로 증식했다. 그래서 이 시절의 누구도 "작은 집에 살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큰 집은 건축이 자초한 계급 시스템이라서. 24평은 그렇다 치지만, 34평은 타인의 유의미한 눈빛을 갈취한다. 46평부터는 말이 달라진다. "그런 집은 좀 살만 하지." 근데 살만 하다는 말은 무슨 소리지? 방 하나 더, 죽은 시간을 쌓아두는 벽장 하나 더, 그런 얘기야? 이때 "저 사람, 래미안에 산대"라는 말 한 줄의 무게는 "그런 데 살만 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진실을 기꺼이 함축한다.
나는 대놓고 조소한다. 한강변으로 이사해 날마다 흐뭇해 죽겠어도, 매일 내다보며 행복에 자지러지진 않을 걸. 한강변에 산다는 훈장에는 올림픽 대로며 강변 도로의 금속 천둥 같은 소음은 제외돼 있을 걸. 집이 넓어 봤자 청소만 늘 걸. 넓은 만큼 외로움도 커질 걸. 안 보이는 틈새는 공처럼 부푼 먼지 차지일 걸.
비싸고 넓은 집이 주는 쾌적함은 때로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이 많았다. 롯데 타워에 살면 담배 하나 사자고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 하고, 인색하게 열리는 창문에 산소호흡기를 달아야 할 거야. 전기세 무서우면 거기 살지도 않았겠지만, 어쨌든 청풍명월의 기쁨은 모를 거야. 청소하는 분을 시켜 너무 깔끔해진 공간은 필시 정리된 슬픔 속으로 밀어 넣을 거야. 거긴 진짜 집이 아니라 세트 같아서 뭔가 잠깐 대여한 기분이 들 텐데, 그런 데서 어떻게 살지? …시비 걸어 봤자, 속만 쓰리는구나.
집은 땅 위에 지어지지만 때로 사람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집에도 나의 밥상이 있고, 나의 밤이 있고, 나의 울분을 삼켜주는 벽이 있다. 비가 새는 천장, 무너진 벽, 도배가 벗겨진 곳에서도 아이들은 자란다. 집은 보호 받고 싶은 마음. 내가 누군지 잊지 않으려는 장소. 주소가 아닌 관계의 지도. 이젠 이야기를 다시 써야 한다. 집을 상품 아닌 권리로 정의해야 하고, 그 권리는 등기 여부에 따라 위축되지 않아야 하며, 소유보다 중요한 가치는 안정감이라는 것에 얼른 합의해야 한다. 존엄은 머무름과 일상, 반복과 애착에서 오는 것. 그러므로 집의 출발점은 작은 방, 한 사람이 편히 누울 수 있는 바닥에서 시작되어야할 것이다.
우리가 집에 원하는 것은, 내 자리를 땅에서 찾는 것.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것, 그날 밤, 은종처럼 퍼지는 웃음 소리이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문장을 쓴다.
집을 '갖지' 않고 '살고' 싶다.
by 이충걸(에세이스트, 전 GQ코리아 편집장, 장편소설 ‘너의 얼굴’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