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읽지 않음’ 상태로 방치된 메일과 메시지, 각종 콘텐츠 플랫폼의 알림 숫자를 알고 있다. 노후를 위한 연금저축이나 보험 등도 가능한 한 빨리 세팅하는 게 효과적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하는 것 사이에는 드넓은 강이 존재한다. 미뤄둔 일이 어렵거나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닌데도 혼자만의 과업으로 남겨 두면 더 급한 일들에 한없이 순서가 밀려난다. 그리고 끝끝내 미해결 과제로 남는다. 이렇게 미뤄둔 일들을 타인과 한 공간에 모여서 해결하는 새로운 모임문화가 있다. 바로 '어드민 나이트(Admin Night)'다.
함께여도 혼자, 혼자지만 함께
요즘 미국과 영국의 2030세대 사이에서는 밀린 업무들을 친구들과 모여서 처리하는 어드민 나이트가 확산 중이다. 모임 장소는 대개 누군가의 집 거실이기에 카페나 스터디 룸 등을 이용할 때보다 비용 부담도 적다. 이들은 서로의 일을 도와주거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저 노트북과 할 일을 챙겨 한 공간에 모인 후 각자의 일을 할 뿐이다.

[친구의 거실에 모여 각자의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어드민 나이트 풍경 © AI 생성]
어드민 나이트는 2025년 말 틱톡에서 빠르게 확산됐고, 2026년 초부터는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기 시작했다. 밀린 메일과 같은 업무 처리 시간을 공유하는 생산적 만남이 이 모임의 핵심 가치로, 함께하는 것이 각자의 일을 더 잘 해내게 만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경찰과 도둑 게임을 하기 위해 모이는 '경도 모임', 감자튀김을 먹기 위해 모이는 '감튀 모임' 등 최근 국내에서도 소규모 일회성 모임이 활발하다. 하지만 이들이 취미나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과의 가벼운 연결을 지향한다면, 어드민 나이트는 삶의 현실적인 부담을 나누는 느슨한 연대에 가깝다.
타인의 존재가 업무 효율에 미치는 영향
혼자서는 시작 자체가 어려웠던 일이 다른 사람들과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훨씬 수월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집에서는 하기 어려웠던 일들을 카페에서 집중적으로 빠르게 완료해 내는 경우가 가장 흔한 예다. 이러한 경험의 심리적 토대에는 '바디 더블링(Body Doubling, 물리적/가상적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일 또는 공부를 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자리한다.

[한 공간에 모여 업무/공부를 하는 모습 © unsplash]
바디 더블링은 원래 ADHD를 치료하고 관리하는 전략으로 주목받았다. ADHD 전문 매거진 'ADDitude'에서는 ADHD가 있는 사람들이 청구서나 행정 서류처럼 미루기 쉬운 업무를 해내는 데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방법으로 바디 더블링을 소개했다. 실행하는 어려움을 외부 환경 조성으로 보완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코넬 대학교가 운영하는 학술 플랫폼 arXiv에 게재된 연구〈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가상 현실에서 ADHD 치료를 위한 바디더블링 설계(You Are Not Alone: Designing Body Doubling for ADHD in Virtual Reality)>에서 바디 더블링의 효과를 실험했다. ADHD 성인 12명을 대상으로 '혼자 작업, 인간 바디 더블, AI 바디 더블' 조건을 비교한 결과, 혼자 작업한 사람보다 인간이나 AI와 함께 작업한 사람의 과제 수행 속도와 집중 수준이 더 높게 나타났다.
밀린 일을 해내기 위해 함께 멈춰 서는 시간
어드민 나이트가 사회적 트렌드로 대두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난해 글로벌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Deloitte)가 44개국 2만 3천여 명의 MZ세대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Z세대의 40%가 항상 또는 대부분의 시간을 스트레스와 불안 속에서 보낸다고 응답했으며, 74%는 스트레스 때문에 휴가를 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고물가와 번아웃이 중첩되는 시대의 젊은이들은 서로 현실적인 부담을 나누고 해결할 수 있는 소규모 모임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기에 어드민 나이트는 '허슬 컬처(hustle culture)', 즉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대한 조용한 반발이기도 하다.
또한, 어드민 나이트는 개인의 자기 규율과 생산성을 강조하던 문화에서 벗어나 연대 속에서 책임을 나누는 방식으로 전환되는 사회적인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드민 나이트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바느질을 하거나 수확을 함께하던 공동체적 노동의 현대적 변형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드민 나이트라는 트렌드의 배경은 단순하다. 해야 할 일이 밀리는 건 단순히 게으른 탓이 아니라 혼자서 시작할 여력이 없는 상태일 수 있으며, 그 여력은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 있는 행위만으로도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드민 나이트의 세계적 확산은 그동안 누군가와 함께하는 공간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필요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by Editor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