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로이터 통신은 '유럽연합(이하 EU)'이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Directive, 이하 CSDDD)'의 적용 범위를 대폭 축소하는 방향으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보도에서 로이터 통신은 EU 관계자들을 인용해 CSDDD 적용 대상 기업 기준을 종업원 5,000명 이상, 연매출 15억 유로(한화 약 2.5조) 이상으로 상향하는 방안이 사실상 최종 조율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기존 기준인 종업원 1,000명 이상 또는 연매출 4.5억 유로(한화 약 7,400억) 이상에서 대폭 상향된 것으로 유럽기업 중 약 70%가 규제 대상에서 제외될 것으로 전망된다. 때문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 후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EU 전경 ⓒ 유럽의회 Multimedia Center]
기업의 경제적 부담을 고려해야 할 때
CSDDD는 EU가 지난 수년간 추진해온 공급망 기반 ESG 규제의 핵심 법안이다. 이 지침은 기업이 자사의 공급망 전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 침해, 환경 파괴 등의 위험요소를 예방하고, 이를 공시하도록 규정한다. 기업이 CSDDD를 위반한다면 글로벌 매출의 최대 5%까지 벌금이 부과될 수도 있다. 상황이 바뀐 것은 경제불안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최근 유럽 각국에서 고금리와 경기 둔화로 인한 경제 불안이 확대되자, 프랑스, 독일 등 주요국이 기업의 부담 완화를 이유로 법안 축소를 주장해왔다. 유럽의회 내 다수파 역시 CSDDD의 범위를 축소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분석이다.
EU의 글로벌 ESG 리더십 후퇴 우려도
기후와 인권 등을 주제로 하는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반발하고 있다. ESG 규제는 물론 기후변화대응, 지속가능경영의 글로벌 기준으로 역할 중인 EU가 스스로 기준들을 포기하는 모양새 때문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명문화한 진전이 EU의 공식발효 1년 여 만에 미국을 비롯한 여타 국가들, 엑슨모빌과 같은 다국적 에너지 기업의 반발에 위축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CSDDD 완화에 반발하며 사임을 발표한 네덜란드 사회당 소속 EU의원 라라 볼터스 ⓒ 유럽의회 Multimedia Center]
이번 결정으로 CSDDD에서 규정하는 의무들이 완화되며 기업들이 전체 공급망이 아닌 직접 거래 대상에 집중할 수 있게 됨으로써 기후변화, 제3세계 노동착취와 같은 ESG 차원의 의제에 대응하기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글로벌 ESG 규제, 확장 아닌 정비기 진입 신호
이번 결정은 ESG 규제 흐름이 전면 확장에서 조정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EU는 ESG 규제의 선봉장 역할을 해 왔지만 후퇴를 선택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기후변화를 인정조차 하지 않으며, 친환경에너지 프로젝트에 대한 예산 취소를 진행 중이다. 아시아 국가들의 상황은 이와 다르다. 일본과 중국은 ESG 관련 규제를 확정한 기존의 입장에 대한 번복 없이 이행을 목표하고 있다.
현 상황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작용할까? EU 공급망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은 일부 적용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아진 반면, 이미 ESG 경영 체계를 구축한 기업들은 투자 대비 효과가 불확실해진 상황이다. 고객사인 유럽 대기업의 실사 요구는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지만 글로벌 조달망 내 ESG 기준이 민간 차원의 적용 과정에서 어느 정도 완화될지 확언할 수 없는 유동적인 시기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ESG의 성장통이 시작됐다
EU의 ESG 규제 완화 움직임은 단순한 후퇴가 아닌 규제의 제도화, 현실 적용 간의 긴장 관계를 드러낸다. 즉, ESG라는 주제는 '도덕적 선언' 내지는 '원칙 다지기' 단계에서 '정책 실천을 위한 조율'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따라서 ESG 관리영역에 포함되는 글로벌 공급망, 규제당국, 투자자 간 ESG의 기준 적용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될 수도 있다.
우리기업 역시 기준 변화 자체에 의존하기보다 기업의 자발적 ESG 전략 수립과 실사를 바탕으로 유동성에 대응하는 접근이 필요할 시점이다.
by Editor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