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궁금했다. 사람들은 남이 먹는 걸 왜 구경할까? 근데 그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여기서 재미있다는 단어는 과학이라기보다, 새벽 두 시에 라면을 끓이고 싶은 충동에 무릎 꿇는 당신의 허무와 닮았다.)
가끔 먹방은 21세기의 콜로세움이자, 디지털 군중 심리의 실험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로마 황제의 통치 전략은 빵과 서커스였다. 지금은, 치킨이 끝나면 피자, 피자가 끝나면 초코 케이크. 알고리즘 자동 재생이 우리를 다스린다. 로마 시민은 대신 칼을 든 검투사 덕에 피를 흘리지 않았고, 우리는 타인의 포만감으로 대체된 서커스를 보며 칼로리 걱정을 잊는다.
한 입, 한 모금은 흐름의 단위이다. 신 메뉴 첫 리뷰라는 타이틀, 10분 안에 피자 열 판 클리어라는 카운트다운. 규칙 대신 신속, 충성 대신 호기심, 기억 대신 업데이트. 경험은 분할지불된다. 재생 버튼은 신용카드보다 관대해서 체류 시간을 한도액으로 삼는다. 알고리즘은 당신의 위장을 모른다. 머무른 시간, 머무를 확률만 안다. 식욕의 스트리밍화랄까. 아무리 배가 불러도 피드는 포만하지 않다. 배 말고 손가락이 굶주려 스크롤을 못 끊는 밤. 결의는 내일로 이월된다. 다이어트는 주말부터, 구독 취소는 다음 영상부터.
먹방은 욕망을 해방하는 척 규율한다. 방송사와 플랫폼, 광고주와 외식업체가 합세한 조리법 따라 화면에 국물이 흐른다. 모든 재료는 알고리즘이 설계한 집단적 표준에 맞춰 규격화되어 있다. 간장게장은 속이 꽉 차야 하고, 젤리는 심장보다 쫄깃해야 하며, 밥은 윤기가 찰찰 돌아야 한다. 젓가락을 칭칭 감은 치즈는 클릭 수의 밧줄이며 광고 단가로 환산되는 데이터의 물질. 누가 무대의 기아를 연출하고 과식을 상품화하고 시장기에서 이윤을 챙기는지는 명약관화하다. 상당 부분은 플랫폼이, 유튜버는 생활비 정도를, 자영업자는 새 손님과 간헐적 매출 상승을 얻는다. 괴물 짜장 세 그릇을 먹은 유튜버가 건강검진 때 고지혈 수치에 난감해할지는 몰라도 어쩌다 돌린 채널이 누군가의 생계를 지탱하는 것이다. 더러는 이를 경제적 선순환이자 사회적 정의 실천이라 부르지만, 상생의 또 다른 이름은 아직 못 찾겠다.
아무튼 우리는 기꺼이 포로가 된다. 웃으며 프로그램에 길들여지는 순간만큼은 권력의 냄새보다 홍어 냄새가 더 달다. 유튜버가 치킨을 한 입 베어 물 때 부지 중에 맥주캔을 여는 건 약속인지도 몰라. 떡볶이가 더 매울수록 저항감은 봄눈 마냥 녹아 내린다. 빵을 베어 먹듯 마음 속의 경고음을 씹어 삼키는 것이다.
ASMR은 먹방이 시각적 소비를 넘어 청각적 실험으로 진화했다고 시위한다. (무슨 논문 제목 같지만) 소리의 우연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정도? 고독은 소음을 필요로 한다. 그녀가 먹는 호흡이 우리를 구한다. 초장에 모듬 회 찍는 소리가 고독의 빈 공간을 메울 때 다른 이는 분노의 방아쇠를 당긴다. 뭐가 됐든 음식이 사라져도 음향은 남아 우리가 사는 세상을 떠받친다.
사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도너츠 가루를 터는 소리, 햄버거 포장을 뜯을 때의 파찰음, 짬뽕 국물이 끓어오르는 음향, 출연자의 파안대소에 후한 점수를 준다. 잘려진 ASMR 포인트에 리듬과 시간을 구성하는 먹방의 편집 행위가 맞물린다. 리듬과 시간이 엮인 채 인간의 허술함을 드러내는 무대에서는 국물이 흘러 어쩔 줄 모르고, 매워서 재채기를 하고, 휴지를 찾느라 허둥대는 손짓의 해트닝이 조회수를 올린다.
먹방은 늘 구원의 잔열을 남긴다. 오늘 하루 엉망진창이 된 마음은 팔목 굵기 통김밥만이 감싸줄 수 있어. 늦은 밤, 불멸의 배달 앱을 기웃거리는 손이 마우스를 클릭한다. 때맞춰 어제 미더덕을 날로 먹던 남자가 부각을 뜯어 입에 넣는다. 으스러지는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린들 직접 듣는 사람이 없다. 구독자 대신 먹어주는 유튜버의 어금니는 마냥 진지할 따름이다.
예전 식탁은 '우리'라는 문법을 복습하는 자리였다. 지금은 취향 포트폴리오가 나를 대행한다. 비건, 육식, 극한 매운맛, 키토, 할랄, 라멘 ASMR. 우리는 맛의 시민권을 여러 장 넣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스탬프를 찍는다. 좋아요는 선언이고, 알림 설정은 서명. 다이어트 앱이 덜어내는 체중보다 재생목록이 더 빨리 찐다.
오늘 밤도 두 시간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고 15미터 곱창 목도리가 그의 내장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미지 섭취? 배는 고픈데 어쩐지 배부른 것도 같다. 다이어트 한다면서 김치냉장고에 케이크를 넣어두는 심리일까? 보관하는 것 자체가 의지를 보여주는 셈일까? 남이 먹는데 왜 내 공복 상태가 설핏 채워지는 걸까? 먹방은 혹시 칼로리 프리 다이어트일까? 그게 무슨 영양 순환 시스템이냐고 묻는다면 정신적 비타민 B12 정도라고 답하련다. 남의 위하수증을 구경하며 공허를 채우겠다는데 누가 그걸 탓한다고?
"같이 밥 먹자는 말은 역시 현생 인류의 윤활유다. 그런데 이젠 많이들 혼자 산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설거지하고, 혼자 스크롤을 내린다. 대신 함께 본다. 먹방은 화상 통화 없는 디지털 연회니까. 외롭다는 말은 흔하지만, 외로움이 언제 들이닥치는지는 자기도 모른다. 대체로 밤 11시 이후, 냉장고에 먹을 게 없을 때 먹방은 틈새를 메운다. 생물학은 이걸 미러 뉴런의 작용이라고 설명할지 모르겠다만.
같이 먹는 느낌이라는 댓글이 채팅 창을 떠다니지만, 그건 관계가 아니라 접속이다. 만찬의 대화는 익명의 웃음, 한국적 약어 ㅋㅋㅋ, 알파벳 Mukbang!!!. 접속은 되돌릴 수 있으니, 마음이 식어서 나가버리면 끝. 우리는 피드의 관광객이고, 크리에이터의 몸은 과잉을 떠맡는 부랑자. 관광객은 이동의 자유를, 부랑자는 이동을 강요당한다. 그런데 구독자는 떠날 권리가 있지만, 크리에이터는 오늘보다 자극적인 내일을 길어 올려야 한다.
알고리즘도 가세해서 네가 머물 곳은 다음이라고 자꾸 속삭인다. 근데 언제쯤 ‘다음’이 아닌 ‘지금’에 머물 수 있을까? 무슨 대단한 혁명이라도 필요할까? 오늘 밤 화면을 끄고, 라면 하나 덜 끓이고, 옆 사람 이야기를 한 숟갈 더 들으면 잠깐이라도 머물 수 있을까? 그 잠깐이 이 가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앉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식탁일지 모르겠다.
사실 먹방은 이야기 장르다. 주인공은 음식이고, 화자는 먹는 사람. 김치찌개를 휘저으며 못 먹던 옛날을 들먹이는 이, 순댓국을 뒤적거리며 군대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 크래커를 씹으며 어제의 연애사를 털어놓는 이. 음식이 이야기의 매개체로 작동할 때 우리는 책장을 넘기듯 영상을 스크롤하며 모르는 이의 실패와 평화를 엿본다. 먹방은 과식(또는 괴식) 구경이라기보다 욕망과 결핍과 고립으로 무친 삼위일체의 무대이기 때문에. 공동체 의식을 대신 차리는 장치, 외로운 도시의 사교, 우리가 아직 군중으로서 웃고, 탄식하고, 동정받는 증거이기 때문에.
액정 화면은 이윽고 다리가 접힌 식탁이 되어 천지사방에서 사람을 끌어 모은다. 그여자 유튜버가 맛있다고 하니까 혼자인 식탁이 넓어진 기분도 들고, 식은 밥도 괜히 따뜻해진 것 같다. 먹방의 매혹은 연결의 환상 위에 아롱진다. 혼자가 아니라는 착각, 같이 먹는다는 감각이 진짜든 가짜든 중요한 건 10분이라도 덜 외롭다는 사실이다. 혼잣말이 대화로 바뀌는 순간이라면 그때만큼은 혼자가 아니지. 고독을 달래려다 고독을 증명하는 셈일지라도 모두가 아이러니를 받아들인다. 고독은 아무도 완전히 이길 수 없으니까.
착각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매우 효율적인 에너지이다.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믿는 것, 화폐라는 종이 쪼가리를 따르는 것, 사랑이 영원할 거라 우기는 것, 다 착각이다. 아, 다시 착각으로 돌아왔구나. 착각으로 살아가는 포유강, 영장목, 사람속의 세상에 착각의 기술이 널 뛸 때 먹방은 착각의 가장 소화 잘 되는 버전인 것이다.
그런데 이따금 인간은 구멍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입이라는 구멍으로 끝도 없이 집어넣는. 모든 것은 치킨 한 조각에서 시작된다. 젊디젊은 여성 유튜버는 과식을 장려하지도 절제하지도 않는다. 중간 지대를 탐험하며 카메라 앞에서 치킨을 물어뜯는 순간, 그녀는 동시에 두 존재가 된다. 한쪽은 한 끼를 때우는 인간, 다른 한쪽은 구독자의 위장이 되어 대신 저작운동해주는 배우. "신 메뉴가 나왔다고 해서 먹어보고 싶었어요"하는 멘트에는 치킨 날개 50개를 해치우는 연극이 아롱진다. 검투사가 쓰러질 때 군중이 환호했듯이 닭다리 뼈가 바닥에 쌓일 때 채팅 창은 불이 난다.
사실 어떤 땐 기계처럼 음식을 밀어 넣는 분이 파이프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장은 한계까지 확장되고, 턱과 혀가 쥐가 나도록 노동할 때. 크리에이터가 고통과 쾌락의 경계를 오가며, 기묘 신묘 오묘한 흡입 쇼를 펼치면 팔로워는 그 몸의 과부하를 즐긴다. 이때 감탄과 감격의 댓글은 장엄한 집단 의식과 같다. 그리고 그분의 신체는 곧 권력을 새기는 텍스트가 될 것이다.
대왕 돈가스 10장, 라면 20봉지, 치킨 30마리. 과식은 도전으로 둔갑하고, 화면은 음식의 양을 자본으로 환산한다. 튀겨진 닭이 쟁반에 쏟기는 소리. 뜯기는 살점. 닭은 벌써 죽었는데, 두 번 죽는 것 같다. 솔직히 섬뜩하다가도 웃긴다. 한 입 가득 물고, "와, 대박!"을 외치는 얼굴 코미디. “위대하다”는 댓글을 다는 사람도 코미디. 구독자는 먹방의 폭력성을 소비하는 동시에 자기 삶 속에서 시연한다. 더 먹고, 더 사고, 더 본다. 사실 자기도 조금씩은 파이프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아무도 배부르지 않다. 먹는 사람, 보는 사람 똑같이 뱃속의 공허를 키운다. 먹방은 영원한 결핍의 시스템. 웃음과 보상, 탐닉과 도덕, 관음과 동정심, 금욕과 파계가 뒤섞여 하나의 콘텐츠로 조율되는 과정은 놀라울 따름이다. 저러다 배 터지지 싶으면서도 자기가 직접 먹은 게 아니라는 심리적 영양소가 이 편의 위장 관에 차오르고….
마약은 금지되고, 섹스는 부끄럽고, 폭력은 위험하다. 그러나 밥은 허락 받은 쾌락이며, 죄책감 없는 중독이자, 손쉬운 축제이다. 경찰, 신부님, 정치인, 직장인 모두 우둔살 앞에선 평등한 족속들이다. 먹방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열망하며, 어떤 방식으로 지배받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굶주림이 지나간 시절에 과식만큼 강력한 서사도 없다. 과장된 풍요는 역설적이게도 가난의 기억을 드러낸다. 그런데 잔뜩 차리면 오래 전의 기근을 지울 수 있을까? 역설은 지워지지 않는다.
급기야 결혼식장은 DNA의 카니발을 벌인다. 생물학적 공포(굶으면 안 돼), 사회적 신호(우리 다 같이 먹자), 재정적 과시(이렇게 차리느라 돈 많이 썼어). 이때 신랑 신부가 받는 플래시보다 강한 빛이 식당에서 흘러나온다. 하객들은 의례보다 밥이 중해서 들짐승처럼 식당으로 몰려간다. 신랑 신부는 배경. 꽃은 장식. 뷔페가 주연. 접시를 들고 늘어선 이들의 행렬에 한 세기 전 쌀 배급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숟가락이 열병식처럼 일제히 들어 올려지자 접시는 국경선처럼 구획된다. 웨딩 드레스의 흰 주름은 공기처럼 비고, 꽃 장식은 서둘러 시들고, 사회자의 멘트는 먼 포성처럼 흩어진다. 축하보다 숟가락이 빠르고, 치아가 박수를 친다. 그 순간이 가장 무섭다. 위장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아서.
굶주림의 벽 앞에서 모두가 먹고 웃고, 먹고 삼킨다. 웃음이 늘 어긋나는 건 불안은 소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수천 년 굶주렸고, 전쟁은 쉴 새 없었고, 밥상은 좌불안석이었다. 세포에 각인된 알람은 틈날 때마다 지령을 보낸다. 먹어라. 또 먹어라. 굶는 건 죽음. 먹을 때를 놓치면, 다음 세대는 없다. 그러나 굶지 않는다는 확신, 내일도 밥이 있다는 약속만큼 소중한 것이 또 무엇이란 말인가.
카메라는 먹는 사람을 정면으로 붙잡고, 그의 입과 수저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나는 먹고 싶은걸 다 먹을 수 없다는 압박감으로 힘들어 죽겠는데, 풀 메이크업을 한 여자 유튜버는 닭 한 마리를 해체하듯 먹어 치운다. 닭기름은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 번쩍이고, 종이 포장지는 리드미컬하게 바스락거린다. 그녀의 손목 스냅, 마늘이 기름에 잠길 때의 흰 거품 소리는 작은 합창처럼 들린다. 다음 날, 모니터엔 강릉 가뭄을 해갈할 만큼 육즙 넘치는 토마호크 스테이크가 온통 흥건하다. 또 그 다음날에는 젓가락에 매달린 치즈 실오라기에서 김이 피어 오른다. 카메라가 조직과 광택을 금지된 부위처럼 집요하게 클로즈업할 때 잠깐 생태학적 음울함이 스물거린다.
고기 굽는 화면은 연기 실험실 같아서 질감도 냄새도 탄소도 없지만, 현실의 식탁으로 옮기기도 전에 지구는 이미 부채를 떠안았다. 한 접시 스테이크의 연료가 된 물과 토양과 공기는 오간 데 없다. 불판을 구르는 기름 방울은 맛의 전령사가 아니라 작은 탄소 폭탄이며, 삼겹살의 미친 윤기는 메탄가스의 일기예보. 소고기 한 점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항공권만큼 무겁다지만 카메라가 무게를 잴 리 없다. 그러나 다들 지구가 끓든 말든, 라면 끓는 소리에 더 귀 기울인다.
무관심화된 도덕이 음식의 뒤안길로 돌아가면 우리는 죄책감 대신 밈을 공유하고, 질문 대신 타임스탬프를 찍는다. 10:12 고기 뒤집는 클립 레전드의 틈새로 폐기물의 정치학이 물씬하다. 촬영용으로 데워졌다 식은 접시들, 한 입 용으로 고용된 과잉 소스, 버려지는 시청 시간. 그러나 폐기는 죄가 아니라 성능으로 환산된다. 체류 시간은 전리품, 스킵은 손실, 재방문은 충성. 남은 건더기는 다음엔 남기지 않겠다는 약속 뿐이다. 이 편에서 쓰레기를 0으로 만들자고 부르짖은들 저 편에선 누부신 잉여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액정 화면이라는 양극단을 잇는 도착적 교각 위에서.
고속도로 휴게소 만두를 씹는 유튜버의 입술은, 일주일 내내 편의점 삼각 김밥만 먹는 청년의 입술과 같은 색이 아니다.누군가의 침샘이 행복할 때, 다른 이의 위장은 빈 곳간. 불협화는 자주 외설적이다. 사회가 불평등하다하나 반 나절이면 배 고프기 마련이니까. 시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건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기 때문에 .
과거 서구 제국주의 시절, 탐험가들은 동방의 식탁을 기록했다. 기록의 목적은 동양의 기이한 풍속을 소비하는 데 있었다. 얼핏 먹방과 겹친다. 세계 동시접속 시청자의 눈앞에 오른 불닭볶음면은 극한의 매운맛이라는 도전 과제로 변형되고, 김치는 생물학적 발효 음식이라는 경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은 그가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와 먹었는지의 총합일 것이다. 결국 먹방은 후세 인류가 21세기 한국인은 왜 저렇게까지 먹었는지, 음식을 먹으며 카메라는 왜 보는 건지 연구하라고 남기는 증빙자료지 싶다. 누가 순댓국을 먹으며 “오늘은 내장 비율이 높다”고 말하는 순간, 동시대의 음식이 기록될 테니. 조선조 사람들은 “오늘 밥상에서 은어를 구워 먹었다”고 일기며 그림으로 남겼다. 지금은 4K 화질로 오도독거리는 오돌뼈 소리를 저장한다. 미래의 고고학자들이 유튜브 서버를 발굴한다면, 문명의 정점이자 퇴행이라고 복합적인 답을 내리고는 이렇게 적을 것이다. “이 분들의 위장은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건 치즈를 늘리는 취미이다. 서울 필동에서 부산 초량동에 닿을 만큼 길게.” 그들이 치즈 폭포라는 장르를 어떻게 이해할지 참 궁금하다.
이제 마지막 문장을 남긴다.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덜 외로운 이유는, 더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by 이충걸(에세이스트, 전 GQ코리아 편집장, 장편소설 ‘너의 얼굴’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