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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인터뷰
[기고] 법정 드라마에 기후소송이 올라야 하는 이유
2025.09.15

2013년에 영화 '변호인'은 1,000만 관객을 넘겼고, 2022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국내서 시청률이 20% 가까이 치솟았고,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극으로서의 재판이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히 장르적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법정 분쟁은 사회적 정의와 제도적 모순, 약자의 권리 보호라는 주제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서사이자, 판결을 통해 갈등이 극적으로 해소되는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담아내기 때문이다. 법정에서의 서사를 극의 소재로 삼은 콘텐츠의 역사는 멀리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그리스 비극에서 신들이 주재하는 재판이나 성경에 전해지는 솔로몬의 재판은 인간 사회가 법과 정의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려는 첫 장면들이었다. 이 전통은 1930~40년대 초기 할리우드 시대로 이어지며 법정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 무대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사법권 독립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적법절차와 법정주의가 생활 속에 안착하기 시작했다. 소송이 시민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소재가 되자 영화와 드라마는 법정 장면을 극적 긴장의 클라이맥스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변호사와 판사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본격적인 법정물이 인기를 끌었고, 시대를 지나며 법정물은 하나의 장르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장르가 됐다.


'우영우'를 보고 크게 감동하고 영감을 받았다. 시즌 2가 확정되고 제작에 돌입한다는 뉴스를 보고, 메인 작가에게 기후소송을 다뤄달라는 제안 이메일을 썼다. 우리가 법정 드라마를 보며 감동을 받는 것도 결국은 정의와 권리를 향한 싸움 때문인데, 지금 현실에서 그 무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건은 바로 기후소송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정 개인의 잘잘못을 넘어 세대와 사회 전체, 더 나아가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법정 위에 올리는 일, 이것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아쉽게도 이때는 답을 받아보지 못했다.



ESG / ESG오늘 / 이에스지

[기후 헌법소원 천 공개변론 공동 기자회견 현장 ⓒ 기후솔루션]



기후위기 시대, 탄소중립 이행과 모두의 지속가능함을 담은 요구는 소송의 형태로도 선명하게 나오고 있다. 전 세계 여러 재판부는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생명, 자유, 재산권을 침해했다거나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문화적 권리나 주거권 침해라는 전례나 판례가 없는 소송을 마주하고 있다. 기후문제는 법의 전통적 틀로 다루기엔 낯설 거나 방대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도전이 녹아있기에 대다수의 기후소송은 각국 사법부는 물론 미디어에서도 중대하게 다뤄진다.

한국에서도 상징적인 기후소송이 등장하고 있다. 정부의 기후변화 대응이 충분하지 않아 미래세대를 비롯한 시민들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청소년과 다양한 시민들이 청구인이 되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헌법소원이 있었다. 2024년 8월 헌법재판소는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수준이 일부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한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역사적인 기후소송의 이정표로 평가받았다.


지난 8월에도 사회적 관심이 모인 기후 소송이 나타났다. 사과, 벼, 감귤, 복숭아, 딸기 등을 재배하는 전국의 농업인 6명이 한국전력공사와 5개 발전 자회사를 상대로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국내에서 농업 분야의 기후 피해에 대해 온실가스 최다 배출 기업집단의 법적 책임을 직접 묻는 첫 민사소송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사법부의 판단에 따라 앞으로 다배출 기업, 즉 기후위기에 실제로 기여한 당사자들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본 이들에게 피해 보상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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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열린 농업인 기후피해 손배소송 기자회견 ⓒ 기후솔루션]



기후소송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한 개인이나 기업의 잘못을 가리는 데 있지 않다. 형태는 달라도 기후소송은 모두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기후위기 대응의 미흡함과 다배출 기업의 책임, 미래 세대의 권리 문제는 모두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로 나아갈지를 묻는 질문이다. 복잡한 이해관계, 장기적인 시간 축, 그리고 사회 전체의 운명을 건 판결이라는 점에서, 기후소송은 그 자체로 장르적 긴장감과 감동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서사다.


최근 JTBC 드라마 '에스콰이어'가 시청자들의 큰 호응 속에 종영했다. 매 회차 사건의 밑바탕에는 넓은 의미의 '사랑'이 있었다. 김재홍 피디는 이 드라마를 두고 "법을 다루지만 결국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라고 설명했다. 사실 기후소송도 다르지 않다. 기후위기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는 농민과 어민, 미래를 걱정하는 청소년들의 행동 역시 결국은 사람과 삶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오늘의 갈등과 내일의 희망이 법정이라는 무대에서 교차한다면,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울림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번에는 제작진에 기후소송을 다뤄달라고 졸라볼 생각이다. 대학시절부터 이어진 오래된 인연을 무기로 삼는다면 조금 다른 결과를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by 김원상(기후솔루션 언론 커뮤니케이션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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